어떻게 사랑할까?
- 작성자 : 웹섬김…
- 조회 : 676
- 22-01-30 08:58
어떻게 사랑할까?
누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계명을 가르치시며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라고 말씀하십니다. 뺨을 치는 행위, 겉 옷을 빼앗는 행위, 길을 가다가도 무조건 막무가내로 빼앗는 행위는 그 당시 로마 군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심판하던 로마 군병들이 하였던 행동은 그래서 아주 지극히 평범한 행동과도 같았습니다.
갑자기 길을 가다 뺨을 맞는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갑자기 길을 가다 겉 옷을 빼앗긴다면 어떨 것 같습니다. 당시 겉옷은 흔한 옷이 아닌 평생 하나 장만할까 말까 한 재산 목록 1호와도 같은 것이지요. 갑자기 길을 가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무작정 빼앗아 간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수치심을 넘어,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그들이 나를 미워하여 하는 행동이지만, 오히려 내가 그들을 미워하고도 남을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주님은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 뺨을 치는 자에게 다른 뺨도 내밀라 말씀하십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뺨을 칠 때는 손등으로 주로 쳤습니다. 이것은 신분 상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주인이 종에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다른 뺨을 내밀면 뺨을 치는 자가 손 등이 아닌 손바닥으로 쳐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즉, 더 이상 주인과 종, 높은 자와 낮은 자의 관계가 아닌 대등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나는 너와 대등한 관계임을 시인하고 마는 셈입니다. 겉 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까지 주라는 말씀은 로마 법에 겉 옷은 강제로 빼앗을 수 있지만 속옷을 빼앗는 자는 강도죄에 해당이 됩니다. 그러니 겉옷을 빼앗은 자에게 속옷까지 주고 말면, 빼앗는 자 스스로 나는 강도임을 자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내 것을 강제로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돌려 달라 하지 말고 주라는 말씀은 다시 돌려 달라 하지 않음으로 해서 비록 강제로 빼앗겼지만 내 의지로 그것을 준 것이 되기에 오히려 자비를 베풀고 선을 행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졸지에 그것을 강제로 빼앗은 자는 구제를 받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 안에 담긴, 사랑의 명령에 담긴 깊은 뜻은 세상에 힘없이 끌려가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이끌어 가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따르느라 늘 손해 본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늘 바보 같다는 소리만 들으며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결코 손해 보게만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도록 만드십니다. 이 세상에서 주의 사랑의 명령에 응답하여 선을 행하는 일은 바보 같은, 미련한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앞장서 이끌어가는 지혜로운 방법인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말씀하시며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오히려 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익숙한 세상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에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그래서 저주나 악담을 들으면, 똑같이 되갚아 주려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스스로 내 자신이 피해자임을 시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피해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가 결코 피해자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피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저들이 저주해서 내가 지금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혹 내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혹 내게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늘 우리 마음에는 이 피해의식이 슬그머니 올라옵니다. ‘너 때문이다, 당신 때문이야.’ 그래서 그 피해의식으로 인해 우리는 동일한 마음으로, 받은 대로 동일하게 갚으려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이는 죄인의 습성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죄인의 습성으로 더 이상 피해자처럼 살지 말고 의인답게 축복의 사람으로 살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축복의 사람은, 축복을 받은 사람은 그 축복을 나누며 사는 자입니다.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를 통해 약속을 이루고자 하셨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 즉 복의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참된 하나님의 자녀라며 우리는 당연히 축복의 통로로, 축복을 전하는 자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저주하는 자를 똑같이 저주하며 살면, 그 자체로 우리는 저주받은 인생임을 시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주받은 인생이 아니라 축복받은 인생입니다. 아니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어떤 순간에도 저주가 아니라 축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피해 의식에 젖어 똑같이 저주하며 살지 말고 축복 받은 자답게 힘껏 축복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댓글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