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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사이


이해와 오해 사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이 바로 오늘 우리가 지키는 종려 주일입니다. 이 날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으로 모여 들었고, 그 인파와 함께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자 그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9)라고 외치며 메시야로서 이제 자신들의 소망을 이루어주실 것을 기대하며 크게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이날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제자들과 공유하고 나누기 시작하십니다. 정확히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위하여 누군가의 손에 의해 팔리게 되실 것까지 밝히시기도 하십니다(마26:2). 그러는 중에 하루는 베다니에서 나병 환자였다가 주님께로부터 고침을 받은 시몬의 집에 예수님께서 머무실 때 마리아라 불리는 한 여인이 자신의 전 재산과도 같은 향유 한 옥합을 자기고 나와 식사 중에 계신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모두가 놀라고 당황하던 차에, 일부 제자들은 이 비싸고 귀한 옥합을 낭비한 일에 대하여 이 여인을 꾸짖고 나무라게 됩니다. 누가 보아도 값비싼 옥합을 깨뜨려 사람 머리 위에 다 쏟아 부은 행위는 참으로 쓸데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의외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오히려 칭찬하시며 옥합을 깨뜨린 이 행동이 예수님을 위해 한 ‘좋은 일’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26:12)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지금 무슨 일을 위해 남은 시간을 보내고 계신지를 이 여인은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도무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는 눈치입니다. 무려 3년 이라는 시간을 예수님 곁을 지키고 따라 다녔던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던 제자들 틈에 가롯 유다라는 제자는 한발 더 나아가 예수님의 행동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기준에는 메시야라면 당연히 정치적인 행보를 이제는 나타내야 하며, 이제 이처럼 사람들의 관심과 환대와 폭발적인 인기를 힘입어 로마의 압제와 권력에 대항하여 독립된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할 때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 메시야로 믿었던 예수가 싸울 의지는 전혀 없이 힘없이 무력하게 십자가를 지고 죽겠다고 이야기를 하니 가롯 유다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그는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 대제사장들을 은밀히 만납니다. 그리고는 예수를 은 30에 팔아 넘기고야 맙니다. 그가 의도한 것은 아마도 그렇게라도 예수를 대적하던 자들에게 넘기면 궁지에 몰린 예수가, 그리고 따르는 무리들이 뭔가 행동에 옮길 것을 기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가롯 유다의 행동은 예수님의 사명을 정확히 오해한 데서 벌인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찌보면 그는 가장 똑똑하다 할만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재정 전반을 맡겼던 것입니다. 사리 판단이 빠르고 이치에 밝은 성품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마도 그에게 재정을 맡기는 문제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 이치에는 밝았던 가롯 유다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는 너무도 무지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지식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그의 열심이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 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방법으로 어떻게든 이뤄보려고 애쓰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그것이 예수님을 오해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똑 같은 말을 듣고서도 어떤 이는 정확히 이해하고 행동에 옮기는 반면, 어떤 이는 정확히 오해하고 행동에 옮기게 됩니다. 행동에 옮겼다는 측면에서는 모두가 같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측면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고 인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머리에 옥합을 깨뜨렸던 여인의 행동은 모든 이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반면 가롯 유다의 논리는 오히려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일을 그가 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와 오해가 낳은 차이입니다. 내 편에 서서, 세상 사람들 편에 서서 모두가 지지하고 인정한다 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이해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해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때로 모두에게 비난 받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여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보여준 신앙의 교훈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음의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가는 여러분의 신앙의 모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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