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말씀

목회서신

형제여!


형제여!


초대교회 교인들은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형식적인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2천 년 전 사회적으로 엄연히 계급이 존재하던 그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형제, 자매라 부른 것은,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 간에 새로운 관계가 맺어졌음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내가 좋아할 만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좀 불편한 사람, 상대하기 껄끄럽거나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 눈이 먼 사울에게 안수하였던 아나니아에게는 사울이 딱 그런 존재였습니다. 본래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교회를 잔멸하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가서는 그를 “형제 사울아!”(행9:17)라고 부릅니다. 사실 그가 사울을 형제로 부르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아나니아가 그렇게 하도록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얼마나 잔인하게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인간인지 익히 알고 있던 아나니아는, 사실 사울을 찾아가 안수해 주라는 주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다메섹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해를 끼치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의 이의 제기와 기우를 한마디로 일축하셨습니다. 사울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택한 당신의 그릇이므로 사울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명령 한마디에 아나니아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거두고 사울을 찾아가, 그를 믿음의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반문합니다. ‘내가 꺼리는 그 사람을 왜 만나야 하는가?’ ‘왜 그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하는가?’ ‘왜 그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 ‘이 세상에 하고많은 사람 가운데 하필이면 왜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어야 하는가?’ 때로는 이와 같은 질문이 우리 자신을 곤혹스럽고, 또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오직 위로부터, 주님께로부터만 주어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왜 내가 그 사람을 만나야 하며, 왜 그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하며, 왜 그 사람 곁에서 더불어 살아야 합니까? 내가 그렇게 하도록 주님께서 그 사람을 내 곁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절대적인, 그리고 선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기에 아나니아는 자신이 꺼리던 사울을 찾아가 그를 믿음의 형제로, 동역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 아나니아가 사울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형제’라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아나니아가 사울을 '형제'라 부를 때 사용한 헬라어 '아델프호스'는, 여인의 자궁을 가리키는 헬라어 '델프휘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같은 자궁을 모태로 하여 태어난 사람들만 친형제자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아나니아는 사울을 그저 형제라 인사치레로 한번 불러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자신의 친형제처럼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로 하여금 사울을 찾아가게 하신 주님의 명령 때문이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아나니아 자신이나 사울이나, 모두 한 자궁에서 태어난 사이였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긍휼의 자궁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로 자궁을 가리키는 '델프휘스’에서 형제를 뜻하는 '아델프호스’가 유래된 반면, 구약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자궁을 뜻하는 단어는 '라함’인데, 이것은 '자궁'과 함께 '긍휼'이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자궁과 긍휼은 구별되지 않고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긍휼로 구원받고,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여기 다메섹에서 주님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아주 대단한, 뭐 특별히 내세울만한 사람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12 제자의 반열에 들었던 아주 특별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이름의 뜻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고백하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저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그저 당신의 제자로 삼아 주시고, 그저 한 명의 일꾼을 세우는 사명을 주신,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그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사울이라는 자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자이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려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그는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이 말 한 마디에 더 이상 아무 항변도 하지 않고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그렇게 주님의 일방적인 긍휼과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자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긍휼로 사울을 택하셨음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받았음을 우리 모두 고백한다면, 그와 같은 긍휼로 ‘저 사람’도 구원받았음을 인정하시고 주 안에서 한 형제임을, 한 자매임을 고백하며 함께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며 나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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