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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이유


용서할 이유


바울은 자신을 비난하고 고통스럽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용서하며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 권면합니다.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고후2:10) 이 말씀은 고린도 교인들이 징계받은 자를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바울이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실로 성도간에는 서로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성도가 성도를 용서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주님은 형제가 잘못하거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마18:22). 


그런데 과연 용서가 잘 되시던가요? 나를 공격했던 사람, 나에게 피해를 주었던 사람, 나를 속였던 사람에게 용서를 베푸는 것이 쉽던가요? 쉽지 않습니다. 어떨 때는 용서고 뭐고 그냥 속에서 올라오는 대로 독설을 퍼붓고 싶기까지 합니다. 또 그렇게 해도 괜찮을 법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습니다. 그런데 원수마저도 용서하라니요? 하나님이 내 편이 아닌 것 같고,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분처럼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이 아니시며, 우리에게 힘겨운 것을 막무가내로 요구하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늘 인간의 생각보다 높은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또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분명한 주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간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곳이 어디입니까? 바울은 ‘그리스도 앞’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누구십니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사하신 분이십니다. 즉 그리스도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을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용서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용서하는 사랑을 베푸신 그분은 우리가 죄지은 형제 앞에 섰을 때에도 함께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우리가 의롭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것입니다. 너무도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은혜를 베푼 자 앞에서 우리가 어찌 다른 형제의 멱살을 잡고, '당신은 죄인이다'라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아니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사해졌기 때문입니다. 에밀 브루너(Emil Bruner)의 말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로 인해 저와 여러분이 죄사함을 얻었습니다. 은혜를 얻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다른 성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아니 마땅히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지은 죄의 값이 일만 달란트라면 형제가 나에게 지은 죄의 값은 백 달란트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도 주님 앞에서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우리에게 굴레를 씌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하셨기에, 우리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영국의 극작가 세익스피어의 글 속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용서함처럼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하네!"라고 우리는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과 사람을 만나거든, 그 상황과 사람에게서 용서의 이유를 찾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 주님 안에서 용서의 이유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부어지는 참된 위로와 평안 속에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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