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말씀

목회서신

신앙의 완주


신앙의 완주


예전에는 성탄절하면 성극을 빼 놓을 수 없었습니다. 저의 고등부 시절에는 여름 수련회를 마치고 나면, 곧바로 성탄절 성극 준비에 들어가곤 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본이 따로 없어서 고등학교 3학년 선배 중에 글 잘 쓰는 한 명이 도맡아 대본을 한 두 달에 걸쳐 쓰고, 배역을 정하여 몇 달 동안 준비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를 돌아보면, 다들 어리숙한 나이였지만 각자 맡은 역할을 위해 정말 오랜 시간 열심으로 준비하였고, 특별히 주연이든 조연이든, 혹은 조명 등을 맡은 스태프로 참여하든 다들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함으로 결국에는 완성도가 높은 성극 한편을 하나님께 올려 드렸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성경에도 보면, 여러 다양한 극들이 다양한 배우들에 의해 펼쳐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배우가 자기가 맡은 역할을 피와 땀으로 수행하고 나면 막이 내리고, 어느 새 조명은 꺼지고, 연기자는 어김없이 무대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때 그때마다 한 시대라는 무대에 어느 한 종을 출연시켜 너무나 아름다운 하나님의 드라마를 역사에 펼쳐 보여주셨습니다. 그 중의 한 명이 다윗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완수한 다윗은 어느새 자기의 위치로 겸손히 돌아가 사라져 버린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그 임무를 완성한 수많은 영웅들이 서 있는 자리를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히12:1)


네,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 마디로 경주를 끝까지 달려낸 완주자들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바통을 전해 받은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 환호성을 지르며 응원과 격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달려내기 위해서 혹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확인하라는 권면의 음성과 함께 말입니다. 거추장스러운 것을 몸에 잔뜩 진 채 최고의 결과를 바라는 것은 교만하고 무지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펼쳐지는 경주를 생각해 보면, 경주하는 자는 0.1초라도 그 기록을 단축시키기 위해 냉혹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의 경주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경주에 맞춰 자신의 삶을 최적화하지 않는다면 금메달을 꿈꿀 자격이 없는 것과 같이 우리 신앙의 경주에도 최상의 기록과 완주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신앙의 완주를 위해 어떤 준비를 우리는 해야 할까요? 우리가 완주하고자 하는 이 경주를 이미 돌파한 신앙의 선진들은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표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죄의 최종적인 결과인 멸망을 상기시키기보다 죄의 접근성에 대한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다는 뜻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그다지 해로워 보이지 않을 수 있는 죄. 일상에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바로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그 죄는 우리를 반드시 얽어매어 멸망과 파괴와 사망으로 끌고 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극히 혐오스럽게 다가오는 죄로 인해 실족하는 자는 적습니다. 대개 일상에서 패배하고 마는 것입니다. 매일매일의 삶에서 자신과 동행하며 동거하는 심히 작은 죄가 서서히 장성하여 결국 그 죄에 완전히 삼킴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혹시 지금 우리는 일상의 작은 죄들을 너무나 너그럽게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우리를 향해 호소하고 있는 또 한 가지 당부가 있습니다.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인내로써 감당하라는 부탁입니다. 경주는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완주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당한 경주”(the race that is set before us, ESV)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딤후 2:5)이라고 말합니다. 요구된 희생을 회피하고, 예정된 고난에서 도망치는 것은 반칙입니다. 십자가 없이 면류관을 추구하는 것은 편법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연단과 채찍과 훈계 없이 이 길을 갈 수 있다는 망각에서 깨어나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현실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내는 풀무불 속에서도 손상되지도, 파괴되지도, 변질되지도 않는 중심을 소중히 간직하며 정해진 기한이 다 차기까지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내는 모습입니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올 한 해 신앙의 경주를 완주하기 위해 얼마나 힘껏, 얼마나 정성껏 달려 왔는지요? 얽매이기 쉬운 죄로 인해 자주 넘어져 있지는 않았는지요? 주님이 말씀하신 룰이 아니라 내가 정한 룰대로 가려고 편법과 불법을 쉬이 저지르지는 않았는지요? 이제 2024년 마지막 남은 한 달을 통해 바르고 온전한 신앙의 자세로 우리 앞에 놓은 경주를 끝까지 잘 완주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


댓글목록

TOP